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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악산 이야기

◆ 용 초(龍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서 남쪽으로 십리쯤 가면 억수동에 이른다. 지금부터 400년전 억수동의 한마을에 양씨 성을 가진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산에서 약초를 캐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양씨 부부는 비록 가난하지만 금슬이 좋아 늘 화목하게 지냈지만 아이가 없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양씨부부는 산에서 약초를 캐고 내려 올 때면 으레 큰 바위 밑에서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하고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곤 했다. 어느 날 밤 양씨 부인은 선녀 셋이 구름을 타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 다음 태기가 있게 되었다. 양씨 부인이 잉태한지 열달이 되어 해산할 날만 기다렸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고 열두달째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남편인 양씨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양씨 부인은 계집애 세쌍둥이를 낳고 산고로 숨이 진 것이다. 양씨는 아내가 죽은 그곳이 싫어서 세쌍동이를 안고 집을 떠나기로 했다. 양씨가 지금의 용초 폭포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 갑자기 커다란 천둥소리가 나고 불이 번쩍하더니 땅이 갈라지고 꺼지기도 하는 것이다. 땅이 꺼져내려 가면서 절벽을 이루고 그 밑에 시퍼런 물이 괸 못이 생겼다.

양씨가 넋을 잃고 있는데 물속에서 용 한 마리가 크게 울부짖으며 튀어 나와 절벽 꼭대기에 올라와 양씨가 안고 있는 세 쌍둥이를 빼앗아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세 딸은 용과 더불어 승천해버린 것이다. 양씨는 부인을 잃고 지금 또 용에게 세딸을 빼앗기게 되자,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벽에서 몸을 날려 방금 생겨난 시퍼런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양씨가 몸을 던진 곳으로부터 아래 못을 향하여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용초와 용초폭포가 생겼다고 하고 양씨부인이 태몽에서 본대로 쌍둥이 세딸은 선녀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부인은 용녀가 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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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굴

제천시 덕산면 왕이굴

석회암으로 생긴 천연 동굴로 그 옛날 왕이조사가 이 굴에서 견성성불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70년대에 인근 덕산면 억수리 일대에서 2차례나 무장 간첩이 침투한 이래 정부 지시로 수년간 굴의 입구를 폐쇄시킨 적도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굴에다 개를 넣고 굴 입구를 폐쇄하였더니 개가 단양의 뒤뜰에서 새카맣게 되어 나왔다고 한다. 즉, 이 굴이 단양과 통했다고 일부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 굴은 입구로부터 40m쯤 되는 곳에서부터 오르막 고개가 있고 이 고개에 오랜 세월동안 천장이 무너져 쌓인 흙 틈으로 어른 머리통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어 그 구멍을 통해 안으로 돌을 굴려보면 얼마를 구르다가 쿵하고 소리가 들려 이 무너진 천장 부위만 긁어내면 안으로 더 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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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악산신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산면 한수면 경계에 있는 명산이 월악산이다. 산세가 준엄하고 웅장하며 기암과 절벽 그리고 웅장한 수목과 맑은 물들로 경치 또한 가경을 이룬다. 한수면 송계리 쪽의 월악 산록에 월악가지(月岳柯址)가 있다. 신라 때 부터 월악산 신사가 설치되어 제천(祭天)하던 곳이다. 그리고 월악신사는 이름 있는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다 실패하여 물러난 얼마 안 되는 고려 고종 병진년에 몽고는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왔다

충주까지 내려온 몽고군은 충주 공략에 실패하자 충주에서 물러난 월악산성을 공격했다. 충주와 월악 일대에서 피난민이 이곳 월악산성에 몰려들었다. 그 옛날부터 월악이 피난지로 이름나 있던 까닭이다. 몽고군이 월악산성에 물밀 듯 쳐올라 왔다. 그런데 별안간 안개가 끼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스럽게 일어나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공격하던 몽고군은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세찬 번개와 천둥 그리고 비바람에 넋을 잃고 공포에 휩싸여 어찌 할 줄 몰랐다.

필시 월악산신이 노한 산신이라고 생각한 몽고군은 겁을 먹고 더 이상 어떻게 해보지 못한 채 문경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나자 왜군의 일대는 순식간에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신립장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충주와 월악주변 주민들은 떼를 지어 월악산성으로 난을 피해 몰려갔다. 그 피난민 가운데 구씨는 구래골에서 홍씨는 상시골에서 정씨는 정번 데기골에서 피씨는 안홍골에서 각각 피난하게 되었다. 왜군들 월악산성만은 건드리지 못하였으므로 피난민들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지금도 송계리에는 그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피난처 “충주 월악산아래 지심 왜란 유뢰전지경”이라고 풍수설을 두청비결이 전하여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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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소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한수면 송계리는 본래 충주시 덕산면에 속해 있었는데 행정구역 변경으로 제천시에 편입된 곳이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내가 흐르므로 송계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는 사자빈신사지라는 절터가 있었는데 그 앞에 아홉개의 소(沼)가 있고 이것을 구룡소라 부르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곳이란다.

아주 옛날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논에 모를 심지 못한 사람들 하늘만 쳐다보고 비오기를 바랬으나 비가 쉽게 내리지 않았다. 밭곡식들도 모두 타 들어가 이제 폐농 할 형편이 되었다. 기우제를 관에서도 올리고 민가에서도 올렸지만 그래도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았다. 이런데 이 고을 충주현감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머리와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더니 현감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그대가 우리 신선이 노니는 곳을 찾을 수 있다면 비를 얻을 수 있으리라. 현감은 꿈속에서 어찌 속인이 신선이 노니는 곳을 알 수 있겠느냐며 그곳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랬더니 노인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기특하여 한가지만 가르쳐준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동남쪽(월악산) 밑을 찾아보시오. 꿈에서 깬 현감은 관속을 풀어 월악산 밑에 신선이 놀만한 곳을 찾게 하였다. 사방을 돌며 찾아 헤매던 관속하나가 구룡소가 그럴듯한 곳이라 말을 하였다. 현감은 급히 그곳으로 가서 살펴보니 과연 산수가 가히 신선이 노닐만한 곳이라 구룡소 가에 제단을 차리고 정성드려 기우제를 올렸다. 그랬더니 기우제가 끝날 무렵이 되자 물속에서 용이 꿈틀하고 솟았다 가라앉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금방 억수같은 비가 쏟아 졌다. 현감은 몹시 기뻐 우장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충주로 들어가는데 어떤 농부가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논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현감은 몹시 노하여 농부를 불러 꾸짖었다. 지금 그렇게 기다리는 비다 내려 모두 비를 맞으며 기뻐하고 있는데 농사짓는 사람이 비 맞기가 싫어 우장을 쓰고 일을 하다니 그래서야 농사짓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꾸중을 들은 농부는 현감에게 아뢰는 것이었다. 원님께서 기우제를 지내서 내리게 한 귀한 비는 몽땅 논이나 밭에 있는 곡식들이 맞아야 하는 것이지 어떻게 사람이 맞아서 옷을 젓게 하여 빗물을 허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현감은 깨달은 바 있어 다른 사람에게 우장을 하여 비를 맞지 않도록 하라 이르고는 자기도 우장으로 몸을 감싸고 충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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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들에 관한 숨은 이야기

한수면 송계리

송계리에는 전쟁과 관련된 지명과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동창’ 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군수물자 보관 창고였기 때문이다. 월악산의 산세가 워낙 험했기 때문에 마을 생성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송계3리 구여곡 역시 임진왜란을 피해서 구씨와 여씨가 들어왔다고 해서 ‘구여곡’ 이라고 붙여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의병과 승병들이 구국을 위해 창의하게 된다. 송계리에는 승병들의 전국 총본부인 ‘승병도총본부’가 있었던 곳이라 전한다. 이곳은 산세가 험해서 사람이 걸어다니기조차 힘들었던 곳이지만, 문경을 거쳐서 충주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 가등청정이 문경을 거쳐 이곳을 거쳐 가려고 염탐꾼을 보냈지만, 염탐꾼은 승병들에게 잡히고 말았다고 한다. 그 염탐꾼의 말이 소나무 송자가 있는 곳은 왜군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가등청정의 누이가 조선의 역학서를 통달한 여자였는데, 그 누이가 정감록을 보고 가등청정에게 조선에 가거든 소나무송자 들어있는 곳에 들어가면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하여 가등청정과 그의 군대는 ‘송’ 자가 있는 들어간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승병들은 마을 곳곳에다 소나무송자와 지경 계자를 썼다고 한다. 그랬더니 정말 왜군들이 송계라고 써있는 지역을 피했다고 한다. 그 당시 왜군들은 송계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몰랐고, 그런 가운데 승병들이 왜군을 기습해서 승리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송계’ 라는 지명이 붙여진 연유이며, 이외에도 임진왜란과 관계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명장이였던 ‘신립’ 장군과 관계되는 전설을 들어보자. 신립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무예가 출중하였다고 하며 장성해서는 권율 장군의 맏사위가 되었다 고한다. 산을 돌아다니며 무예를 닦던 신립이 하는 산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중 해가 저물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산속을 헤매다가 어느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사람들이 없는 폐허로 변해 버린 곳이었다.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니던 중 큰 기와집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 집에서 밤을 지내기를 청하러 갔다. 큼 기와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 처녀에게 신립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지만, 그 처녀는 여기는 흉한일이 있어서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라며 신 힙의 청을 거절하였다. 신립이 그 흉한 일이 무엇인지를 자꾸 묻자, 그 처녀가 말하길 “이 마을의 한 불량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 처녀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고 한다. 그 머슴 이 그 처녀를 사랑해서 혼인하길 원했으나, 처녀의 아버지가 그 청을 거절하고 머슴을 죽이고 말았다. 그 뒤에 머슴의 혼형이 나타나 식구들을 하나 둘씩 죽였고 이제는 그 처녀를 죽이러 오늘밤에 오기로 하였다고 신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죽어가게 됨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이제는 처녀 혼자만 남았다고 하였다. 신립이 그 말을 듣고 무예를 닦은 사람으로서 물러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 처녀에게 자신이 귀신을 물리치겠다고 하였다. 그 처녀의 밤에서 귀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대문에서 소리가 나면서 귀신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신립은 활에다 화살을 먹이고는 ‘잡귀는 물러가라. 어찌 너의 잘못을 모르고 산사람을 괴롭히려 드느냐, 내가 정녕 내 뜻을 안다면 스스로 물러설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내 화살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신립은 대문을 향해서 활을 쏘았다. 그렇더니 화살이 날아가 대문에 맞추고 귀신소리도 없어졌다고 한다. 처녀가 신립을 따라가기를 청하였지만, 신립은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 처녀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처녀는 지붕에 올라가 뛰어 내려 자결을 하고 말았다. 어떤 여자와 잠을 자고 왔냐며 따지기 시작해서 자초지정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신립이 문경새재를 지키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 그 이유는 죽은 처녀가 현몽을 해서 새소리가 들리는 곳에 진을 치지 말라고 했다. 문경새재로 갔던 신립이 보니 까마귀,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려서 충주 탄금대에 진을 치게 되었다. 그랬더니, 왜군과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고 신립도 그곳에서 죽었다. 신립이 문경에서 충주로 갈 때 송계리를 거쳐서 갔다고 한다.

월악산의 모양새를 송계리 사람들은 왕과 왕비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월악산의 정상인 관음봉을 지역사람들은 ‘완광봉’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상봉우리의 모양이 왕관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옆의 중봉은 ‘족두리봉’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왕비의 족두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 주변의 많은 봉우리가 ‘후궁들의 봉우리’ 라고 한다 이것과 연관해서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권력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월악산 송계리에 별궁을 지어 살려고했다고 한다. 이곳으로 내려오던 중 대원군이 권력을 완전히 이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명성황후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도 별궁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았던 주춧돌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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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주사 전설

한수면 송계리

덕주사는 신라 진흥왕 7년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으나, 신라 천년 사직을 무력하게 고려 태조에게 양위하는 경순왕에게 반대하는 강한 의사 표출로서 공주는 시녀와 같이 육로 길 천여리를 걸어서 월형산 월악사에 몸을 숨겼다. 뒤에 아우인 마의태자도 같은 뜻으로 왕궁을 피해서 월악사에 와서 남매가 상봉하고 금강산으로 찾아가는 아우 마의태자와 이별하고 난 다음 덕주공주는 그리운 아우 마의태자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큰 바위에 밤을 밝혀 암각했더니, 해가 뜨자 마애불상으로 변했다는 전설을 남기는 보물 마애불이 있다.

신라의 망국 한과 덕주공주 사후의 공주에 대한 애모가 덕주사로 자연스럽게 고쳐 불리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덕주사는 월악산 아래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덕주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여 그 인연으로 덕주사라 한다.” 라고 기록되었다.

천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절이 비워져 넝쿨 속에 세 번씩이나 묻힌 것을 찾았다는 구전과는 달리 절 기둥이 그대로 아름드리 싸리기둥이 전해져 와서 구조와 색채가 심히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나 한국전쟁 애석하게도 천년고찰은 불타 한 줌 재로 남게 되었다.